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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트레킹)

비 오는날 서울성곽 걷기(남산-광희문)

 

친구들과 인천 앞바다에 있는 섬 장봉도 섬일주 트레킹을 기로 일찌기 보름 전에 약속했는데

그러나 일기예보는 야속하게도 계속 돌풍,강풍을 동반한 비가 온다하니 예보가 어긋나기를 바랬지만

대한민국의 예보가 언제부터 이리 잘 맞는지 참으로 신기하다.

4월 내 일정을 조정할 수 없는 친구의 아쉬움이 내 의견과 교감하여 유서 깊은 서울 성곽을 봄비 맞으며 걷기로

즉석으로 결정하여 서울역에서 만나 남산,신라호텔 뒤편을 지나 광희문까지 성곽을 다녀왔습니다.

"과거로가는 시간여행"

 

 

 

 

 

 ※서울성곽 둘레길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 이성계는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성을 버리고 1394년 10월28일 한양,

즉 지금의 서울을 새 도읍지로 정했다.

도읍의 본격적인 건설 사업은그해 12월 정도전(鄭道傳)에게 도시 건설을 착공하게 함으로서 시작 되었다.

경복궁을 선두로 종묘와 사직을 착공하는 등 궁성의 모습이 갖춰지고 1396년 전국 각지에서12만명을 뽑아

도성의 성곽을 시작 98일 만에 완공하였다.

 성곽의 길이는 17km로 각 구역마다 책임자를 정해 그들의 이름을 성벽에 새겨 넣었다.

성곽은 북악산(청와대뒷산),인왕산,낙산,남산 네곳의 산을 연결해서 축조하였는데 이는 도시의 방어를 목적으로하였다.

도성의 전체적인 완공은 30년 정도 걸렸지만 성곽은 석 달만에 급조된 것이라 허술한 부분이 많아 세종대에

이르러 석성으로 개축 되었지만 처음 완공 당시는 토성과 석성이 혼합된 성곽이었다.

서울 도성은 수도를 방어하는 성이자 왕의 궁궐을 보위하고 있어 가장 내부인 궁성인 경복궁, 그바깥에 도성인

서울 성곽, 가장 외곽에 산성이 쌓여진 삼중 구조이다.

서울 성곽은 적의 공격에 대비한 성이기 보다는 궁궐을 보위하고 수도를 상징하는 성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변고를 치룬 왕조는 침략에 대비 유사시 적과 대응하기 위한 북한산성. 남한산성이 축조되었다.

서울 성곽은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인들이 도시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많은 부분을 훼손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성곽은 70년대에 복원한 것으로 동대문과,낙산,성북동으로 이어져 북악산을 지나 인왕산,

세검정을 거쳐 북한산성에 이르는성곽을 볼 수 있다.

현존하는 성곽은 숙종, 영.정조때 개축된 것이 대부분으로 4대문과 4소문이 있다.

서울 성곽은 현재 사적 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 성곽 및 4대문,4소문 배치도.현재 돈의문(서대문) 소의문(서소문) 혜화문(동소문) 3문이멸실 되었다.

서울 성곽은 남대문부터 서대문에 이르는 성벽이 끊어져 있고, 동대문과 광희문 사이가 끊어져 있으나 그외

성벽은 복원이 되어 연결 되어 진다. (자료인용)

 

 

 

 

 

 

 

※서울성곽 트레킹일지

-트레킹일자 : 2013년4월6일(토) - 날씨 - 비

-트레킹코스 : 남산공원-장충체육관-광희문

                   (약7km  2시간30분)

-트레킹인원 : 3명

-트레킹난이도 : ★☆☆☆☆

 

 

 

 

 

 서울역에서 남산공원까지 이동

자신이 15년간 근무한 호텔을 뒤로하고 한컷

 

 

 

 남산공원 입구

 

 

 

 진달래가 비 맞고 수줍습니다

 

 

 

 김유신 장군상

백범 김구 선생 상과 성재 이시영 선생 상도 지나갑니다

 

 

 

 옛날 어린이도서관 배경 가위.바위,보

 

 

 

 안중근의사 기념관 앞

 

 

 

 개나리도 부분적으로 피었습니다

 

 

 

 남산 팔각정

 

 

 

 남산 봉수대

 

 

 

 일제가 강제로 인왕산으로 옮기 국사당 터

 

 

 

 잠두봉의 무수한  사랑의 열쇠고리

 

 

 

 

 사랑언약 열쇠

 

 

 무수한 사연 사랑언약

 

 

 

 역사 앞에 기대어 봅니다

한양 성곽의 역사는 태조 4년(1395년) 도성 축조의 명을 받은 정도전이 서울의 내사산(內四山)인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 남쪽의 목멱(남산), 북쪽의 백악(북악산)을 실측하고, 이 네 산을 연결하는 성터를 정하면서 시작됐다.

이 방대하고 시급한 사업을 농한기에 완성하기 위해 이듬해 정월부터 11만8000명이 동원돼 시작된 공사는

1396년 숭례문을 시작으로 다음해 4월에는 홍인문의 옹성이 완공되며 끝났다.

그후 27년이 지난 세종 4년에는 전국에서 약 32만명의 인부와 2200명의 기술자들이 동원돼 흙으로 쌓은 성곽 일부를

모두 돌로 바꿨다.

당시 한양의 인구가 약 10만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의 공사였다.

그러나 한양 성곽은 일제 때인 1915년 근대화에 방해가 된다는 명분으로 크게 훼손됐다. (자료인용)

 

 

 

 성곽이 주는 교훈을 생각해 봅니다

 

 

 

 국립극장

 

 

 

 성곽의 시대별 축조법 안내판 - 궁금증 해소

 

 

 

 성곽 밖에 목련이 흐드러집니다

 

 

 

 성곽,목련,주택,호텔이 조화롭습니다

 

 

 

 

 신라호텔 내 다양한 조형물

 

 

 

 신라호텔 내 영빈관 위편

 

 

 

 벗꽃이 탐스럽습니다

 

 

 

 리모델링중인 장충체육관

 

 

 

 광희문(光熙門)

조선시대 사소문(四小門)의 하나

북쪽의 수구문(水口門)으로 서소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체를 성 밖으로 운반해 내던 곳으로 송장

혹은 시체의 문이라는 뜻에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추억의 무쇠 통닭집(청량리)에서 뒤풀이

 

 

 

비가 오는 바람에 갑자기 변경된 서울성곽코스는 몇번 일주를 해봤지만 갈때마다 다른 기분이 듭니다.

마치 역사순례라고 할 정도로 600여년 전의 군사들이 성 쌓는것이 보이는것 같기도 하고 서민들의 애환이 있는 이 길은

서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 속의 사람들까지 서울 성곽길을 걷다 보면 많은 생각과 감정이 오간다.

그 옛날 이 성곽을 쌓기까지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노고가 있었을지, 상상만으로도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다음 코스가 기다려 진다.

친구들아 건강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