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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漢詩

유성룡(柳成龍) 다수

 

 

유성룡

다른 표기 언어 柳成龍 1542(중종 37)~ 1607(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중 민정(民政)·군정(軍政)의 최고관직을 지내면서 전시 조정을 이끌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왕조를 재정비·강화하기 위한 응급책으로서 각종 시무책(時務策)을 제기했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운암(雲巖).

할아버지는 군수 공작(公綽)이고, 아버지는 승지 중영(仲郢)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에 올랐고,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권지부정자, 검열 겸 춘추관기사관, 대교, 전적을 거쳐 1569년(선조 2) 공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1570년 부수찬·수찬을 거쳐 정언·이조좌랑에 오르고, 1571년 병조좌랑, 1575년 부교리·이조정랑·헌납, 1577년 검상·사인·응교, 1579년 직제학·이조참의·동부승지 등을 두루 지냈다.

1581년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무빙차십조 無氷箚十條〉를 올리고 〈대학연의 大學衍義〉를 초진(抄進)했다.

이듬해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대사헌 등을 지내고, 1583년 왕명으로 〈비변오책 備邊五策〉을 지었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대사성 등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을 이유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584년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다음해 〈포은연보 圃隱年譜〉를 교정하고 1586년에는 〈퇴계선생문집〉을 편차(編次)했다.

그뒤 형조판서·대제학·병조판서 등을 거쳐 1590년 우의정에 오르고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책록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왜구의 침입에 대비,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을 의주목사와 전라좌수사에 추천하는 한편 〈제승방략 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을 예전처럼 진관제도(鎭管制度)로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한 정철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군무(軍務)를 총괄하는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직책을 맡았다.

 이어 영의정에 임명되어 왕의 피난길에 따라갔으나,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곧 다시 등용되어 왕명으로 명(明)의 장수 임세록(林世祿)을 접대하고, 의주에서는 2차례 계(啓)를 올려 군사모집, 화포제조, 난민(亂民)의 초무(招撫) 등을 건의했다.

평안도도체찰사에 부임하여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되찾고, 이듬해 호서·호남·영남의 3도도체찰사에 올랐다.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한 뒤 일본군과 화의를 모색하자 이에 반대, 화기제조·성곽수축 등 군비확충과 군사양성을 주장했다.

 환도한 뒤에는 훈련도감의 설치를 건의하고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594년 〈청훈련군병계 請訓練軍兵啓〉·〈청광취인재계 請廣取人才啓〉·〈전수기의십조 戰守機宜十條〉 등을 올려 전시대책과 시무책을 건의하고, 훈련도감의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 紀效新書〉를 강해(講解)했다.

그뒤에도 4도도체찰사가 되어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의 군병을 교련하는 등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 교섭이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 군비보완에 힘썼다. 1597년 이순신이 탄핵을 받아 백의종군할 때 이순신을 천거했다 하여 여러 차례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이듬해에는 조선과 일본이 연합하여 명을 공격하려 한다는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의 무고에 대해 명나라에 가서 해명하지 않는다 하여 북인들의 탄핵을 받고 관작을 삭탈당했다.

1600년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저술활동을 하면서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이 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사회·경제 시책은 대부분이 임진왜란 과정에서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의 인적·물적 자원을 전쟁과 전후수습에 동원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제시되었다. 그중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민심수습책으로 그는 임란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신분에 따라 수관(授官)·면천(免賤)·면역(免役)·부과(赴科) 등 파격적인 포상제를 실시하고, 군사비 이외의 기출을 최대한 억제하여 공물(貢物)·진상(進上) 등을 경감해주는 등 백성에게 실제 혜택이 있게 하여 파탄·와해된 민심을 수습해야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전제 아래 문벌에 관계없이 각 방면의 인재를 등용하며 공사천(公私賤)을 막론하고 병력을 확보하는 등 인적 자원을 동원할 것을 제시했다.

또한 공물·둔전에서 나오는 양곡(糧穀), 노비의 신공(身貢) 등을 미곡으로 대납(代納)하게 하고, 파격적인 포상을 대가로 모속(募粟)을 행하며, 소금을 구워 곡물로 바꾸거나 중강개시(中江開市)를 통해 중국의 곡물을 사들이는 등의 방법을 통해 전쟁에 필요한 군량미를 확보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전시군량확보를 위한 응급책으로서의 성격을 지니지만, 한편으로는 16세기 이래의 공물제(貢物制)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한편 임진왜란중 그가 제기한 국방대책은 민심수습과 인적·물적 자원의 동원을 위한 사회·경제 시책 속에서 구상되었다.

그는 중앙군으로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정병을 양성하는 한편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원칙 아래 거주지 촌락단위로 지방군인 속오군을 편성하는 등의 군사기구 개편을 주장했다.

이 구상은 난민·유민(流民)을 구제하기 위한 둔전론(屯田論)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즉 훈련도감의 경우 정병으로 양성하기 위한 군인 외에 서울에서 1만 명을 더 모집하여 5영(五營)을 두고, 각 영에 2,000명을 배치하여 해마다 반수는 성중(城中)에 남아 연습하고 나머지는 성외에서 빈 땅을 골라 둔전을 만들고 윤번으로 교대시켜 군량공급을 담당하게 했다.

또한 종전의 양민만이 아니라 양반과 천인(賤人)까지도 편입시키는 속오군도 둔전의 설치와 표리관계에 있었다.

그가 제시한 둔전책은 전란으로 동요하고 있는 농민을 안정시켜 무농경작(務農耕作)하게 하는 방안으로 유리민이나 일본군 점령하의 농민을 둔전 가능지역에 모아 정부에서 소·종자·농기구 등을 지급하고 둔전을 경작시켜 궁극적으로는 주민보호·군량확보·기민구제의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는 스승 이황의 학설에 따라 이기론(理氣論)을 펼치고 양명학을 비판했다.

또한 이황의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좇아 기(氣)는 이(理)가 아니면 생(生)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여 기보다 앞서 있는 실체로서의 이를 규정했다. 그는 이황처럼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이기로 분석하지 않았지만, 도심을 한결같이 지켜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일찍부터 양명학을 연구했으나 정통 성리학자로서 이를 수용하지는 않았으며, 양명학이 불교의 선학(禪學)에서 연유한 것으로 간주하고 맹렬히 비판했다.

유성룡은 양명학의 핵심적 이론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과 치양지설(致良知說)이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 지나치게 곧아진'(矯枉而過直) 폐단에 빠진 것으로 불교의 학설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지(知)로, 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을 행(行)으로 병립하는 존재로 파악하고, 어느 하나에 치중됨이 없이 병진해야 한다는 지행병진설(知行竝進說)을 주장했다.

저서로는 임진왜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서애집〉·〈징비록 懲毖錄〉을 비롯하여 〈신종록 愼終錄〉·〈영모록 永慕錄〉·〈관화록 觀化錄〉·〈난후잡록 亂後雜錄〉·〈상례고증 喪禮考證〉·〈무오당보 戊午黨譜〉·〈침경요의 鍼經要義〉·〈운암잡기〉 등이 있으며, 편서로 〈대학연의초〉·〈포은집〉·〈퇴계선생연보〉·〈황화집 皇華集〉·〈구경연의 九經衍義〉·〈문산집 文山集〉·〈정충록 精忠錄〉·〈효경대의 孝經大義〉 등이 있다. 안동 호계서원(虎溪書院)·병산서원(屛山書院), 상주 도남서원(道南書院), 군위 남계서원(南溪書院), 용궁 삼강서원(三江書院), 의성 빙산서원(氷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정수위추풍소패탄(庭樹爲秋風所敗歎)-유성룡(柳成龍)
뜰의 나무가 가을바람에 탄식하다-유성룡(柳成龍)

昨夜秋風何處來(작야추풍하처래) : 지난밤 가을바람 어디서 와
吹我庭前碧桃樹(취아정전벽도수) : 우리 뜰 앞 복숭아나무에 불어구나.
但聞凄凄復騷騷(단문처처부소소) : 쓸쓸하고 또 소소하게 들릴 뿐
葉聲如怨而如訴(엽성여원이여소) : 낙엽 소리는 원망하듯 호소하는 듯하다.
朝起視之但空枝(조기시지단공지) : 아침에 일어나 나가 보니 빈 가지뿐
葉落四散無蹤迹(엽락사산무종적) : 낙엽은 사방 흩어져 자취 하나 없어라.
曾不道(증불도) : 일찍이 말하지 않았나
春華爛熳開滿樹(춘화란만개만수) : 난만한 봄꽃이 나무에 활짝 피어
絶艶粲粲驚人目(절염찬찬경인목) : 뛰어나게 고운 꽃잎 눈부시게 사람 눈을 놀래킨다.
由來盛衰自有時(유래성쇠자유시) : 원래 성하고 쇠함에 절로 때가 있으니
不是天公恩厚薄(불시천공은후박) : 하늘의 은혜가 많고 적음이 아니어라.
老夫愚痴不解事(로부우치불해사) : 늙은이 어리석고 바보스러워 일을 몰라
繞樹行吟空嘆惜(요수행음공탄석) : 나무를 돌아다며 공연히 흥얼흥얼 탄식하노라.

 

 

감사(感事)-유성룡(柳成龍)
감회에 젖은 일-유성룡(柳成龍)

社稷昔艱危(사직석간위) : 지난날 나라가 어려워
奔鯨蕩溟渤(분경탕명발) : 뛰는 고래 바다를 뒤엎도다.
關門失鎖鑰(관문실쇄약) : 관문 방비 잘못하여
列郡如破竹(렬군여파죽) : 여러 고을 대 쪼개듯 당했어라.
延秋呼白烏(연추호백오) : 연추문에 흰 까마귀 울어대고
宮闕烟塵勃(궁궐연진발) : 궁궐에 연기와 티끌 일었어라.
玉輦累遷次(옥련루천차) : 임금 수레 여러 번 옮겨져
六月巡沙磧(륙월순사적) : 유월에 모래밭을 헤맸었도다.
寧知太師宅(녕지태사댁) : 어찌 알았으랴, 태사를 모신 사당
化作傖人窟(화작창인굴) : 놈들의 소굴이 될 줄을.
鴨水淸瀰瀰(압수청미미) : 압록강 물 질펀하게 맑아
遼山明刮目(료산명괄목) : 요동 산이 눈에 뚜렷하였도다.
當時狼狽甚(당시랑패심) : 당시에 낭패가 심하여
事有不忍說(사유불인설) : 일을 차마 말할 수 없었어라.
天道竟助順(천도경조순) : 하늘은 마침내 순리를 돕고
吾王有聖德(오왕유성덕) : 우리 임금은 성덕이 있었도다.
民心不忘漢(민심불망한) : 백성은 마음으로 중국을 잊지 못해
至誠昭皇極(지성소황극) : 지극한 정성 황제에게 밝혀어라.
使臣哭天庭(사신곡천정) : 사신이 천자의 뜰에서 울어
王師歲暮出(왕사세모출) : 황제의 군사 세모에 출동했었다.
白馬李將軍(백마리장군) : 흰 말 탄 이 장군
意氣呑海岳(의기탄해악) : 의기가 산과 바다 삼키도다.
精神動天地(정신동천지) : 정신은 천지를 움직이고
長虹貫白日(장홍관백일) : 긴 무지개는 해를 꿰었도다.
一鼓下箕城(일고하기성) : 한 번 북 울려 평양 회복하고
再進麗京復(재진려경부) : 두 번 진격하여 개성 되찾았도다.
長駈或不戒(장구혹불계) : 길게 몰아가다가 잘못도 하고
恃勝暫蹉跌(시승잠차질) : 이긴 것만 믿다가 잠시 차질도 났었다.
窮獸法勿搏(궁수법물박) : 궁지에 몰린 짐승은 치지 않았으니
少緩非計失(소완비계실) : 조금 늦춤이 잘못된 계책 아니었어라.
衆策極經營(중책극경영) : 모든 계책으로 경영을 다하고
遊說資談舌(유설자담설) : 유세하는 일을 혀끝에 의뢰했도다.
迺於四月末(내어사월말) : 그리하여 4월 말에는
神京歸版籍(신경귀판적) : 서울이 판도에 들어왔도다.
漢南道路通(한남도로통) : 한강 남쪽에 길이 트이고
嵩北妖氛豁(숭북요분활) : 북악산 북쪽에 요기가 걷혔다.
乾坤再整頓(건곤재정돈) : 천지가 다시 정돈되고
日月重煥赫(일월중환혁) : 일월이 거듭 빛났어라.
是歲月臨陽(시세월림양) : 이해 시월 달에
六轡回西極(륙비회서극) : 임금 수레가 서쪽 끝에서 돌아왔도다.
都人迎翠華(도인영취화) : 도성 사람들이 취화 맞으니
佳氣還金闕(가기환금궐) : 상서로운 기운이 궁궐을 둘렀도다.
草草漢官儀(초초한관의) : 초초한 한관의 모습
故老多垂泣(고로다수읍) : 늙은이들 많은 눈물 흘렸도다.
兩宮寄閭閻(량궁기려염) : 양궁은 여염집에 머물고
百僚倚墻壁(백료의장벽) : 백관은 담벼락에 의지했었다.
公私一塗地(공사일도지) : 공사의 모든 것이 없어지고
九街腥風拂(구가성풍불) : 거리마다 비린 바람만 휩쓸었도다.
鍾簴誰復問(종거수부문) : 종을 단 곳 다시 누구에게 물을까
淸廟生荊棘(청묘생형극) : 종묘에는 가시만 우거졌도다.
遺民脫黥劓(유민탈경의) : 남은 백성 적의 형벌 벗어난 자
百千纔二一(백천재이일) : 백이나 천에 겨우 한둘이어라.
饑羸不能起(기리불능기) : 주리고 여윈 자는 일어나지 못한 채
指口求饘粥(지구구전죽) : 입을 가리키며 죽이라도 찾았다.
花明紫殿陰(화명자전음) : 꽃은 궁궐 구석에 피었는데
草綠城南曲(초록성남곡) : 풀은 성 남쪽 굽이에 푸르기만 했다.
所見無異物(소견무이물) : 보이는 건 이전과 다름이 없지만
縱橫惟白骨(종횡유백골) : 이리저리 널린 것은 백골뿐이었다.
孤臣極無似(고신극무사) : 이 몸은 아주 보잘것없어
國事從顚覆(국사종전복) : 나랏일이 따라서 뒤집혔었다.
濫荷三接寵(람하삼접총) : 외람되이 삼접의 총애를 받고
虛叨五鼎食(허도오정식) : 쓸데없이 오정식만 차지했었다.
承恩不能報(승은불능보) : 받은 은혜 갚지 못했으니
萬死有餘責(만사유여책) : 만번 죽어도 책임은 남으리라.
驅馳戎馬間(구치융마간) : 군마 사이에 바삐 다니며
黽勉輸筋力(민면수근력) : 힘써 근력을 바쳤었도다.
風餐薩水岸(풍찬살수안) : 살수 언덕에서 바람 맞으며
野宿坡州雪(야숙파주설) : 파주 눈 속에서 들잠도 잤었다.
釁積丘山重(흔적구산중) : 허물 쌓여 산처럼 겹쳤지만
效計絲毫蔑(효계사호멸) : 효과 있는 계책은 조금도 없었다.
治亂無定形(치란무정형) : 치란은 정해진 것이 없으나
人爲可以卜(인위가이복) : 사람의 일로 점칠 수 있도다.
永念陰雨初(영념음우초) : 곰곰 생각하니 난리 초기에
綢繆或未密(주무혹미밀) : 단속이 혹 주밀하게 못했었다.
廟堂坐麟楦(묘당좌린훤) : 조정에는 인원만 앉아 있고
邊鄙多朽木(변비다후목) : 변방에는 썩은 사람 많았었다.
人情有萬般(인정유만반) : 인정이란 만 가지라
世議多翻覆(세의다번복) : 세상 의논 번복이 많았어라.
維綱旣解紐(유강기해뉴) : 기강이 이미 풀렸으니
萬計歸虛擲(만계귀허척) : 만 가지 계책이 허사이었다.
千兵非所急(천병비소급) : 많은 병사가 급한 것이 아니라
一將眞難得(일장진난득) : 장수 하나 얻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畫餠不可食(화병불가식) : 그림의 떡 먹을 수 없으니
金甌從此缺(금구종차결) : 금항아리 이로부터 이지러워졌다.
亡羊牢可補(망양뢰가보) : 염소를 잃고 우리를 보수하고
失馬廐可築(실마구가축) : 말을 잃고서 마구를 고쳤엇구나.
往者雖已矣(왕자수이의) : 지난 것은 비록 그만이지만
來者猶可及(래자유가급) : 오는 일은 그래도 해갈 수 있어라.
誰能陳此義(수능진차의) : 누가 능히 이런 뜻을 진술하여
一一聞閶闔(일일문창합) : 하나하나 임금께 들려주겠는가.

 

 

제서루이수1(題西樓二首1)-유성룡(柳成龍)
서루에 제하다-유성룡(柳成龍)

貧賤人所厭(빈천인소염) : 가난과 천함은 사람들 싫어하고
富貴人所求(부귀인소구) : 부귀는 누구나 바라는 것이어라.
悲歡與得喪(비환여득상) : 슬픔과 즐거움, 얻음과 잃음은
擾擾不知休(요요불지휴) : 요란하게 그칠 줄을 모른다.
人生在世間(인생재세간) : 사람이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大海一浮漚(대해일부구) : 큰 바다에 뜬 하나의 거품이어라.
百年能幾何(백년능기하) : 백 년이 얼마나 될까마는
萬事眞悠悠(만사진유유) : 만사는 참으로 아득하여라.
居然了塵妄(거연료진망) : 우두커니 속된 생각 털어내고
一笑倚西樓(일소의서루) : 서루에 기대어 한 번 웃어본다.

 

 

제서루이수2(題西樓二首2)-유성룡(柳成龍)
서루에 제하다-유성룡(柳成龍)

西樓雖一間(서루수일간) : 서루가 비록 한 칸이나
亦足容吾膝(역족용오슬) : 족히 나의 무릎은 용납된다.
上有一爐香(상유일로향) : 위에는 향로 하나 놓여있고
殘書數三帙(잔서수삼질) : 남은 책이 두서너 질은 되어라.
平呑遠山影(평탄원산영) : 바로 서면 먼 산 그림자 삼키고
俯挹澄江色(부읍징강색) : 굽어보면 맑은 강빛이 잡히는구나.
主人信貧窶(주인신빈구) : 주인은 참으로 가난하여
三旬九遇食(삼순구우식) : 한 달에 아홉 끼 먹는단다.
獨愛北牕下(독애북창하) : 홀로 즐기나니, 북창 아래 누우니
淸風滿枕席(청풍만침석) : 침석 가득히 맑은 바람 불어온다.

 

 

과탄금대유감(過彈琴臺有感)-유성룡(柳成龍)
탄금대를 지나다가 감회가 일어-유성룡(柳成龍)

上流形勝此中探(상류형승차중탐) : 상류의 경치를 이 속에서 찾아보니
山擁金城水繞藍(산옹금성수요람) : 산은 금성으로 싸고 물은 쪽빛을 둘렀구나.
興廢有時雙淚眼(흥폐유시쌍루안) : 흥폐는 때가 있어 눈에 흐르는 두 줄기 눈물
關津無賴一茅庵(관진무뢰일모암) : 관문 나루에는 외로운 암자 하나 없어라.
還憐銳卒空輸萬(환련예졸공수만) : 가엾구나 만 명의 군사를 부질없이 보내고
坐使䧺都盡失三(좌사䧺도진실삼) : 앉은채로 큰 도읍 셋이나 잃었구나.
廊廟數年無寸效(랑묘수년무촌효) : 묘당에서 수년 동안 작은 공 하나 없어
倚風料理只心慚(의풍료리지심참) : 바람에 의지해 생각해보니 마음만 부끄럽다.

 

 

풍산도중(豐山途中)-유성룡(柳成龍)
풍산 가는 길에-유성룡(柳成龍)

花山東畔一回頭(화산동반일회두) : 화산 동쪽 언덕에서 한 번 돌아보니
雲日蒼茫樹木幽(운일창망수목유) : 구름 낀 해는 아득하고 나무가 울창하다.
蔓草已能工結恨(만초이능공결한) : 덩굴풀 처럼 이미 교묘히 맺힌 나의 한
澄江那得解消愁(징강나득해소수) : 맑은 강은 어떻게 시름을 씻어 줄까.
人間得喪元無定(인간득상원무정) : 인간의 상실감 시름 원래 정해 있지 않아
宇內形骸正若浮(우내형해정약부) : 천지 안의 이 몸이 바로 부평초이로다.
千古至人留一法(천고지인류일법) : 천고에 철인이 한 가지 방법을 남겼나니
只將身世倚虛舟(지장신세의허주) : 다만 빈 배에 몸을 의지하는 것어라.

 

 

단양행(丹陽行)-유성룡(柳成龍)
당양행-유성룡(柳成龍)

丹陽之山高復高(단양지산고부고) : 단양의 산 높고도 높아서
石峯攙天如列戟(석봉참천여렬극) : 하늘 찌를 듯한 돌 봉우리는 창을 벌여 세운 듯 하여라.
一線棧道縈岩巒(일선잔도영암만) : 한 가닥 잔도는 바위 봉우리에 얽혔는데
十步九折迷南北(십보구절미남북) : 열 걸음에 아홉 굽이져 남북이 희미하여라.
巨壑谺然深不測(거학하연심불측) : 큰 골짜기 아득하여 깊이를 모르겠고
陰崖慘慘楓林黑(음애참참풍림흑) : 그늘진 비탈엔 음산하게 단풍숲이 우거졌다.
上坂巉巖下坂絶(상판참암하판절) : 윗 언덕엔 높은 바위 아래쪽은 절벽인데
層氷到着滑鎔鑞(층빙도착활용랍) : 층계진 얼음 곳곳마다 납 녹여 부은 듯 미끄럽다.
人言此是鬼門開(인언차시귀문개) : 사람들은 귀신의 문이 열린 것이라 하니
行人未上心先慄(행인미상심선률) : 행인도 오르기 전에 마음 먼저 떨린다.
我今流離經此中(아금류리경차중) : 내가 지금 떠돌다가 이 곳을 지나는데
百口相隨飢凍迫(백구상수기동박) : 모두가 따라오며 배고프고 춥다 하는구나.
疲牛瘦馬鞭不動(피우수마편불동) : 지치고 마름 말과 소는 채찍질해도 움직이지 않는데
日暮饕風吹虐雪(일모도풍취학설) : 날은 저물고 거센 바람 눈보라가 몰아친다.
狐狸往往嘷我後(호리왕왕호아후) : 여우와 삵은 가끔씩 등 뒤에서 울고
猛獸咆咻當我前(맹수포휴당아전) : 맹수는 고함치며 앞을 막아 서는구나.
懼然神動不可留(구연신동불가류) : 두려워 정신이 아찔해서 견딜 수 없는데
百里行盡無人煙(백리행진무인연) : 백 리를 다 가도 인가 하나 없도다.
僮僕號呼兒女泣(동복호호아녀읍) : 어린 종들은 울부짖고 아이들도 눈물을 흘리니
丈夫到此難爲顔(장부도차난위안) : 장부가 이 지경에 이르니 면목 없구나.
平生學道未得力(평생학도미득력) : 평생 도를 배웠으나 아직 깨치지 못했으니
外物寧作秋毫看(외물녕작추호간) : 외물을 어찌 작게 볼 수만 있을까.
臨風快歌丹陽行(림풍쾌가단양행) : 풍경을 맞아 통쾌하게 단양행을 부르니
自古人間行路難(자고인간행로난) : 예부터 인간의 사는 길은 어렵기만 하여라.

 

 

중차학기상인시권(重次學己上人詩卷)-유성룡(柳成龍)
학기 스님의 시운을 거듭 차운하여-유성룡(柳成龍)

東臺高不極(동대고불극) : 동쪽 누대는 끝없이 높으니
乃在天中央(내재천중앙) : 바로 하늘 중앙에 솟아있구나.
臺邊桂花落秋風(대변계화락추풍) : 누대의 주변 계수나무 가을바람에 지는데
歲晩澗谷多幽芳(세만간곡다유방) : 철 늦은 골짜기에 그윽한 꽃도 많아라.
時有羽衣人(시유우의인) : 때마침 도사 있어
驂鸞駕鶴來彷徨(참란가학래방황) : 난새와 학을 타고 와 방황한다.
我欲尋師往問道(아욕심사왕문도) : 내가 스승 찾아가 도를 묻고자 하나
怊悵雲深石路長(초창운심석로장) : 애달프게도 구름은 깊고 돌 길은 멀구나.

 

 

파사성(婆娑城)-유성룡(柳成龍)
파사성에서-유성룡(柳成龍)

婆娑城上草芊芊(파사성상초천천) : 파사성 위에 풀이 무성하고
婆娑城下水縈廻(파사성하수영회) : 파사성 아래에는 물이 둥글굽어 돈다.
春風日日吹不斷(춘풍일일취불단) : 봄바람은 날마다 끊없이 불어오고
落紅無數飛城隈(락홍무수비성외) : 지는 꽃잎은 무수히도 성 모퉁이에 날린다.
道人神眼覷天奧(도인신안처천오) : 도인의 신령한 눈, 하늘의 진리 살피고
一夜昆明生刦灰(일야곤명생겁회) : 한밤에는 곤명지에 탄 재가 생겼구나.
金剛百萬奉指揮(금강백만봉지휘) : 금강 역사 백만이 지휘를 받드니
尺劍長嘯臨江臺(척검장소임강대) : 큰 칼 긴 휘파람 불며 강의 누대에 서있다.

 

 

숙청풍한벽루(宿淸風寒碧樓)-유성룡(柳成龍)
청풍한벽루에 묵으며-유성룡(柳成龍)

落月微微下遠村(락월미미하원촌) : 지는 달 희미하게 아득한 마을로 사라지고
寒鴉飛盡秋江碧(한아비진추강벽) : 까마귀 다 날아가버리고 가을 강만 푸르다.
樓中宿客不成眠(루중숙객불성면) : 누각에 묵는 나그네 잠 못 이루지는데
一夜霜風聞落木(일야상풍문락목) : 온 밤 서리 바람에 낙엽 소리만 들려온다.
二年飄泊干戈際(이년표박간과제) : 이 년 동안을 난리 속에 떠다닌지라
萬計悠悠頭雪白(만계유유두설백) : 온갖 계책 아득히 머리는 백설이 되었구나.
衰淚無端數行下(쇠루무단수행하) : 늙어서 흐르는 눈물 무수히 흐르는데
起向危欄瞻北極(기향위란첨북극) : 일어나 높다란 난간 향하여 북극을 바라본다.

 

 

記夢(기몽)-柳成龍(유성룡)
꿈을 적다-柳成龍(유성룡)

我生在今世(아생재금세) : 나의 삶은 이 세상에 있는데
尙友在前昔(상우재전석) : 좋은 친구는 지나간 옛날에도 있구나.
永懷千載人(영회천재인) : 천년 전 사람을 오래도록 생각해보나
世遠不可覿(세원불가적) : 시대가 멀어서 볼 수가 없구나.
時來讀遺編(시래독유편) : 때때로 남긴 글을 읽으니
往往見心曲(왕왕견심곡) : 가끔씩 마음의 깊은 곳을 보는구나.
玉盤薦明珠(옥반천명주) : 옥쟁반에 맑은 구슬 담겨있는 듯
淵氷映新月(연빙영신월) : 언 못에 달빛이 비치는 듯하도다.
讀罷三歎息(독파삼탄식) : 읽기를 마치고 세 번 탄식하고
夜就東軒宿(야취동헌숙) : 밤이 되어 동헌으로 나아가 잠을 자노라.
忽夢二三子(홀몽이삼자) : 갑자기 꿈에 두세 분이 나타나
頎然入我室(기연입아실) : 흔연히 나의 집에 들어오신다.
顧我色敷腴(고아색부유) : 나를 돌아보시고 얼굴색 환히 펴시고
一笑情脈脈(일소정맥맥) : 하번 웃으시니 정다움이 끝이 없으시다
定非平生親(정비평생친) : 반드시 평소의 친한 분은 아닌 것 같은데
想像猶面目(상상유면목) : 가만히 생각하면 뵌 것도 같구나..
覺坐獨沈吟(각좌독침음) : 꿈이 깨어 혼자 일어나 시를 읊으니
曉窓風雨急(효창풍우급) : 새벽 창가에는 비바람이 심하게 부는구나.

 

 

秋思(1)(추사(1))-柳成龍(유성룡)
어느 가을에-柳成龍(유성룡)

端居意不適(단거의불적) : 단정히 살아도 마음에 맞지 않아
遠思在關河(원사재관하) : 멀리 생각은 관하에 있도다.
風雨夜來集(풍우야래집) : 간 밤에 비바람 불고
滿庭黃葉多(만정황엽다) : 뜰에 가득 낙엽이 쌓였도다.
懷人旣輾轉(회인기전전) : 그리운 이 생각하니 잠은 안 오는데
況復抱沈痾(황부포침아) : 어찌 다시 병까지 안고 살까.
百慮坐纏繞(백려좌전요) : 온갖 생각에 방에 앉은 채 얽매이니
心事日蹉跎(심사일차타) : 마음은 날마다 언짢아지는구나.

 

 

寓興(우흥)-柳成龍(유성룡)
흥겨워-柳成龍(유성룡)

靜思憐虛寂(정사련허적) : 고요히 생각하니 조용하고 한적한 시간 아까워
間身愛翠微(간신애취미) : 푸른 산기운을 좋아하느냐고 나에게 물어본다.
霧深玄豹隱(무심현표은) : 안개는 짙어 검은 표범 숨은 듯하고
江晩白鷗稀(강만백구희) : 강에 날 저무니 백구는 드물구나..
散月千峯皓(산월천봉호) : 흩어진 달빛에 수 천 산봉우리들 희고
驚霜萬葉飛(경상만엽비) : 서리에 놀란 수 만 나무들은 바람에 흩날린다.
鐘聲如有省(종성여유성) : 은은히 울리는 종소리에 지난날을 돌아보노니
三十六年非(삼십륙년비) : 아직 내 나이 서른여섯 살은 아닐 것이야.

 

 

陶山(도산)-柳成龍(유성룡)
도산-柳成龍(유성룡)

忽忽流年瀉(홀홀류년사) : 문득 흐르는 세월 물 새듯 지나가고
悠悠舊迹虛(유유구적허) : 아득한 옛 자취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구나.
人文今寂寞(인문금적막) : 인간의 문화는 이제 적막하니
天意竟何如(천의경하여) : 하늘의 뜻은 결국 어떠하단 말인가.
落日江波動(락일강파동) : 지는 해에 강의 물결 넘실대고
荒原古木疏(황원고목소) : 황량한 벌판에는 오래된 나무만 드문드문
悲凉千古恨(비량천고한) : 슬프고 처량하다 천년의 한이여.
俛仰秖成歔(면앙지성허) : 고개를 숙였다가 올렸다 다만 흐느껴본다

 

 

江上送客(강상송객)-柳成龍(유성룡)
강가에서 손님을 보내며-柳成龍(유성룡)

沙邊楊柳繫行舟(사변양류계행주) : 뱃사장 버드나무에 거룻배 묶여있고
日暮烟波漲緣洲(일모연파창연주) : 날은 저무는데 물안개 푸른 섬에 자욱하다
無限客愁消不得(무한객수소불득) : 한없는 나그네 근심 삭일 수 없어
更携尊酒上高樓(경휴존주상고루) : 다시 술잔을 잡고 높은 누대로 올라본다.

 

 

春日思家(춘일사가)-柳成龍(유성룡)
어느 봄날 집 생각-柳成龍(유성룡)

楚雲秦樹兩依依(초운진수량의의) : 고향집 구름과 나무숲 사이로 아물아물,
夢裏還家覺後非(몽리환가각후비) : 꿈속에 집에 돌아갔는데 깨고 보니 아니구나.
湖水春來深幾尺(호수춘래심기척) : 호수 물에 온 봄, 깊이가 몇 자나 될까,
棠花飄盡白鷗飛(당화표진백구비) : 해당화 바람에 나부끼고 흰 갈매기 나는구나

 

 

贈僧(증승)-柳成龍(유성룡)
스님에게 주다-柳成龍(유성룡)

此身猶復寄淵氷(차신유부기연빙) : 이 몸은 여전히 못의 얼음처럼 조심하며 사노니
萬事元來不足憑(만사원래불족빙) : 모든 일이란 원래 남에 의지함은 충분하지 못하노라
病裏安心惟習靜(병리안심유습정) : 병중에 마음을 편안히 함에는 오직 고요함을 익히는 것이니
試將禪定較山僧(시장선정교산승) : 선정에 드는 일로 산 속 스님과 견주어보고 싶습니다.

 

 

재거유회(齋居有懷)-유성룡(柳成龍;1542-1607)
고향집을 생각-유성룡(柳成龍)

細雨孤村暮(세우고촌모) : 보슬비 내리는 외딴 시골 날은 저물고
寒江落木秋(한강낙목추) : 차가운 강은 낙엽지는 가을이로다
壁重嵐翠積(벽중람취적) : 아무리 벽이 두꺼워도 이내는 더욱 짙어지고
天遠雁聲流(천원안성류) : 하늘은 높고 기러기 소리는 퍼져만 가네
學道無全力(학도무전력) : 학문에도 진력하지 못하여
臨岐有晩愁(임기유만수) : 학문의 갈림길을 만나니 때늦은 후회가 생기네
都將經濟業(도장경제업) : 오로지 장차 가정 살림 살피며
歸臥水雲 (귀와수운추) : 돌아가 자연에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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