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답사.여행

세종대왕의 둘째아들 계양군파 시제 및 파종회

 

 

 

 

 

어제(2013년 11월3일)  우리집안 종파 어른 계양군(桂陽君) 할아버지의 시향(時享)이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전주이씨 계양군파 종친회 정기총회를 겸하고 있는 이 행사는 세종대왕의 후손이라는 무한한 자랑스러움과 함께

우리 종파가 대대로 이어가야 할 유산 중의 하나라 생각하고 근래에 들어 매년 참석하고자 노력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계양군파의 시향과 종친회는

남양주시 일패동 661번지 사당(별묘)에서  음력 시월 상달 첫째 도래하는 일요일11시에 거행합니다.

후손으로서 저도 자주와 보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춘천 갈 일있을때 자녀들과 함께 잠시 들러가 볼만 합니다.

경춘도로에서 1분이면 근접할 수 있는 거리로서 주변에 자꾸 들어서는 물류창고 등이 안타깝습니다만은 계양군 재실이

우뚝 그 기개를 높이고 있으며  윗쪽 주변의 과수원과 함께 지역의 수호신 노릇을 하는 듯 합니다.

 

 

이전에 내가 쓴 글- 계양군 시향을 다녀와서(2012년) - http://blog.daum.net/rexle4833/382

 

 

 

입구에 다다르면 계양산 돌 푯말이 나옵니다

 

 

 

10시 반에 갔는데 이미 많은 종친들이 성황이십니다

 

 

 

계양군 재실이 많이 작년과 달리 새롭게 보수를 했고 주변의 나무가 정리됬습니다.

 

 

 

재실 내부

 

정면 2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로 사당의 왼쪽에는 위패를 모셔 놓았고 사당 바깥 벽에 현판을 만들어 놓았다.

 

 

 

재실 내부

 

 

 

 

 

 

재실입구의 제관 분방기

 

 

 

 

 

 

시향 전 담화 및 준비

 

 

 

 

시향 전 바쁘십니다

 

 

 

시향 시작합니다

 

 

 

 

회장님 과 제관들이 입장합니다

 

 

 

시향은 대략 3부로 나누어서 이어졌습니다.

1부는 계양군 할아버지.할머니에 대한 초헌,아헌,종헌

 

 

 

 

집례자 - 수고하시는 이우익 부회장님

콧수염이 멋지시고 홀기(笏記) 하실때 특유의 억양이 정겹습니다.

홀기:제례의식때 순서를 적은 글을 일일이 구술

 

 

 

 

 

 

 

 

 

 

 원래 초헌은 이영구 종손이 해야하나 사정상 병일 회장께서 하셨습니다

 

 

 

 

 

 

 

 

 

 

 

 

 

 

 

 

 

 

 

 

 

 

시향2부가 이어집니다

종손인 이영구(19대)로 부터 14대 위의 할아버지,할머니에 대한 제례입니다.

종손이 영구 분은 참석치 못했습니다.

 

 

 

 

 

 

 

 

 

 

 

 

 

 

 

 

 

 

 

 

 

 

시향 행사 제 3부는 종친회입니다

 

제례가 끝나고 종친회가 자동으로 이어지면서 총무보고,재무보고,감사보고 등등

이병일 장님이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식사시간입니다(점심은 도시락 빙 둘러 앉아서 합니다)

 

 

 

 

 

 

 

식사와 행사가 모두 끝나고 이동하여 각자의 묘소로 가서 별도의 제례를 이어갑니다.

저희측 제례는 인근의 산으로 이동하여 14대 할아버지(대흥공),할머니의 묘소를 참배했습니다.

준비해 오신 각종 음식을 깨끗하게 정리한 제단에 진설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진행했습니다

 

 

 

 

 14대 대흥할아버지,할머니 묘소

 

 

 

 

연장자이신 성익 부가 초헌하셨습니다.

이하 사진은 대흥공 할아버지 제례

 

 

 

 

 

 

 

 

 

 

 

 

 

 

 

 

 

 

 

 

 

 

 

 

 

 

 

 

 

 

 

 

 

 

 

 

이어서 내려 오면서 찾은 계양군 묘역, 많이 아시겠지만 한번 정리합니다

 

※이증(李璔 ) 이력

        군호 : 계양군(桂陽君)
        지    : 현지(顯之)

 

 

공의 휘(諱)는 증(璔)이요, 자(字)는 현지(顯之)이며, 신빈(愼嬪) 김씨(金氏) 소생이다.

신빈 김씨는 나이가 어렸을 때 내궁[內家]에 뽑혀 들어가서 세종 대왕(世宗大王)을 모시면서 매우 총애를 받아 여섯 아들을 낳았다.

공이 그중의 장남(長男)으로서 전례에 따라 계양군(桂陽君)에 봉군(封君)되었고 금상(今上, 세조)이 즉위할 즈음에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좌익 공신(佐翼功臣)의 호(號)를 하사받았다.

공과 함께 신빈 김씨에게서 태어난 형제들이 모두 어질었으되, 임금이 유난히 친애(親愛)한 사람은 오직 공 한 사람 뿐이었다.

공도 또한 스스로 임금에게 특별한 지우(知遇)를 받았다고 여기어 더욱 공경하고 진실하게 절의(節義)와 충성을 다하면서 항상 조심스럽게

처신하고 조금도 해태(懈怠)하지 않았다.

천순(天順) 8년(1464년 세조 10년) 정월에 공이 병에 걸리자 임금이 특별히 내의(內醫)를 보내어 약이(藥餌)를 하사하였는데, 백방(百方)으로

 병을 치료하였으나 끝내 효험이 없어서 그해 8월 15일(병신)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은 38세였다.

부음(訃音)이 조정에 알려지자 임금이 몹시 슬퍼하여 먹는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고 3일 동안 조시(朝市)를 정지함으로써 공의 죽음을

애도하고 부의(賻儀)를 더욱 후하게 내려 주었다.

성화(成化) 원년(元年, 1465년 세조 11년) 2월 19일(임인)에 양주(楊州)의 치소(治所) 동쪽에 있는 백석(白石)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예법을 따른 것이었다.

공은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 韓確(한확) 딸을 취(娶)하여 3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인 이풍(李灃)은 영원군(寧源君)에 봉해지고 관찰사(觀察使) 심선(沈璿)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차남인 이융(李瀜)은 강양군(江陽君)에

 봉해졌으며, 그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온아(溫雅)하고 품성이 영매(英邁)하였다.

비록 신분이 귀한 집안에서 성장하였으되 평소에 시서(詩書)를 좋아하여 나이가 어렸을 때부터 충효(忠孝)를 돈독하게 실천하면서 밤이나

 낮이나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오직 임금 한 분에게 온 마음을 쏟았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이 종실(宗室) 중에 인망(人望)이 점잖은 사람을 일컬을 때이면 언제나 공을 첫째로 꼽지 않은 자가 없었다.

아! 공이 이렇게 훌륭했는데도 장수를 누리지 못하였으니, 하늘이 정한 것이리라. 비명(碑銘)을 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효우(孝友)와 충정(忠貞)은 그 덕(德)이 두터웠고, 영명(英明)함과 문아(文雅)함은 실로 견줄 만한 자가 드물었네.

맨손으로 임금을 보좌하면서 한결같은 절의로 곁에서 모시었네. 재산도 넉넉하고 신분도 귀하였으니, 타고난 분수가 본래 마땅히 그러하였네.

아름다운 인망과 주위의 칭찬이 종실의 으뜸으로 꼽히었네.

하늘이 어질지 못하여 공의 수명에 대해서는 인색하였네. 옥(玉)처럼 훌륭한 나무가 부러졌으나, 그 명성은 응당 썩어 없어지지 않으리.

 여기의 비석에 의탁하여 오랜 후대에 비추노라.

(참고인용 - 인물고 권5 국척(國戚))

 

 

 

 

계양군 묘소

 

세종의 둘째 서자. 자 현지(顯之). 이름 증(璔). 시호 충소(忠昭). 어머니는 신빈(愼嬪) 김씨(金氏).

처는 한확(韓確)- 좌의정-딸이다.

세종의 총애가 지극하였으며, 학문을 즐기고 특히 글씨에 능하였다.

한명회(韓明澮) ·한확 등과 함께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일파가 되어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제거하였다.

그 공으로 좌익공신 1456년(세조 2) 1등에 책록된 뒤부터 세조의 측근에서 서무(庶務)의 출납을 맡아 크게 신임을 얻었으며,

1460년 세자가 결혼할 때 가례도감 제조를 겸하였다(자료인용)

 

 

-.

 

 

 

이하 계양군 후손묘역

 

 

계양군은 영원군(寧原君).강양군(江陽君) .부림군(富林君). 방산수(方山守) 등 네 아들을 두었다

차남 강양군은 막내숙부 담양군에게 양자로 갔다.

장남 영원군은 아들이 없어서 세째 아우 부림군의 차남 도안군을 양자로 맞이했다.

 

 

 

 

 

 

 

 

 

이 도안군이 문천정(文川正)과 평양령(平陽令)을 낳아 큰 집을 이루었다.

그리고 부림군의 장남 회안부정(淮安副正)은 외아들 덕양부수(德陽副守) 를 두었고

덕양부수는 말손(말손).희손(희손) 두 아들을 두었으나 손자대에서 무후(無后)했다.

 

 

 

 

 

 

또 방산수는 당대에 후사가 없어서 후손이 끊겼다.

그리고 도안군의 차남 평양령도 후손이 없어서 결국 문천정의 손 만이 퍼져 나갔다.

 

 

 

 

 

 

 

 

 

 

 

 

 

계양묘역이라는 돌 푯말

 

 

 

 

 

 

좋은 상달 음력 시월 첫째주 일요일에 매년 열리는 이 시향은 그 동안 바쁘게 살아 온 생활을 다시 한번 되집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으며

우리 가문의 영광과 이면을 다시 한번 생각케하는 좋은 행사인것 같습니다.

아직 나도 아이들을 데리고 오지는 않았지만 기회가 되면 꼭 한번 들리고 싶습니다.

이 많은 종친인사들의 행사들 위해 준비하시고 진행하신 병일회장님을 비롯한 콧수염 할아버지 등 모든분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더 건강한 모습으로 내년에 뵈었으면하는 바램입니다.

이곳 경기도 남양주 일패동의 단풍도 곳곳에 절정입니다.

우리 시골 사관리 등 당진에서 오신분들 내년에 뵙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사관리측 참석자 : 성익 부,운익 부,응익 부.모, 선익 부,우근 형,장익 형. 나)

같이 버스대절해 오신 서산,태안 등 인근의 어르신들 모두 건강하세요.

음식준비하신분들도 수고 많으셨어요.

 

 

 

 

 

 

 

 

 

 

※ 세종의 가계도

 

 

 

 

 

 

 

  ※  본 시향에 대한 문의 : 총무이사 이성구 010-8854-2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