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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수서동 광평대군 묘역 참배

예전부터 수서동 지날때 마다 한번 가 볼까 했던 광평대군 묘역이다.

직장 생활할때 후배들 왕창 데리고 기분 한번 내려고 수서동에 있는 필경재라는 고급 한정식 음식점 갈때도 가까이에 있는 이곳 묘역을

볼까 여러번 했었다.

오늘 평일 휴일날 원래 북한산 가려다가 사정상 바뀐 대모산.구룡산행에 앞서서 생각난 광평대군 묘역을 들렀다.

 

※광평대군 묘역(廣平大君墓域)

1981년에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면적 413,300㎡인 산에 광평대군 내외의 묘와 아들인 영순군(永順君)의 묘를 비롯해

광평대군의 양아버지인 무안대군 (撫安大君) 방번(芳蕃) 내외의 묘 등 700여 기의 무덤이 있는 공동묘역이다.

광평대군 장의공(章懿公) 이여(李璵)는 1425년(세종 7)에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1432년에 광평대군에 봉해졌다.

1437년에는 조선 태조의 일곱째 왕자로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희생된 방번의 봉사손(奉祀孫)으로 입양되었다.

광평대군은 활을 잘 쏘았으며 문장(文章)에 밝고 음률과 수학에도 뛰어나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다.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신자수(申自壽)의 딸과 결혼하여 영순군을 두었으나 생선을 먹다가 걸린 가시 때문에1444년에 죽었다.

광평대군의 묘는 원래 지금의 강남구 삼성동 선릉(宣陵) 부근인 광주(廣州) 학당리(學堂里)에 있었는데,

이곳에 조선 성종의 능인 선릉이 들어서자 1495년(연산군 1)에 수서동 대모산 기슭으로 옮겼다.

이 묘역에는 오래된 종가재실과 신도비를 비롯해 숙종때 조사한 분묘의 소재 위치를 기록한 세장비(世葬碑)가 있다.

이 묘역 일원은 서울 근교에 있는 왕손의 묘역 가운데 원래의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자료인용)

 

 

 

 

필경재(必敬齋)

 

광평대군의 종손인 이천수공이 건립한 99칸 저택으로 대부분 유실되고 안채와 사랑채만 남은 것을 1999년 개보수하여

궁중음식점으로 사용하고 있다하는 필경재 입구-(반드시 윗어른을 공경할줄 아는 자세로 살라가라는 뜻)

해마다 명절을 포함하여 12차례 제사가 치러지는데, 전국에서 100여 명의 종친이 모인다고 한다.


 

 

 

 

 

 

 

 

 

 

 

 

 

 

 

 

 

 

 

 

이곳은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1425∼1444)의 묘이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에 힘썼고 국어·음률·산수에도 밝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총명하였으며 서예와 격구에 뛰어났으나,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묘역은 서울근교에 남아 있는 왕손의 묘역 중 원형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문중의 묘소 700여 기와 종가의 옛 가옥이 함께 있는

공동묘역이다.

묘역 아래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는 비)가 세워져 있다.

 

첫 느낌은 굉장히 넓고 깨끗하고 잘 꾸며진 정원 같았다고나 할까?

같은 세종대왕의  할아버지를 모시는 우리집안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부럽다.

너무나도 단정하게 집안의 묘를 잘 가꾼 모범적인 묘역을 잘 보고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