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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트레킹)

남한산성 걷기 & 개원사(開元寺)

벌써 2015년 1월이 다 가고 있습니다.

금요일 오전에 시간을 내서 일찍 송파구 마천동에서 시작하는 남한산성 둘레길을 걸었습니다.

약 보름 전에 남겨 놓은 나머지 반의 코스를 채웠는데, 오랫만에 가서 그런지 볼거리가 더 많더라구요.

이전에 갔던 수어장대-남문-장경사(長慶寺)-동문에 이어서 오늘은 서문-북문-종로-개원사(開元寺) 코스를 걸었는데

산성의 명물인 소나무가 주는 안정감과 잘 정비된 산성의 오솔길이 너무나 좋았고 특히 종로로 내려오는 로타리는 매번

그냥 지나가는 코스였는데 행궁인 한남루(漢南樓),연무관(演武館) 등 우리나라 주요 역사의 현장이 곳곳에 산재해 있고

또한 조용한 산속에 자리잡고 있는 개원사(開元寺)의 역사 향기에 취해보는 멋진 산행이자 트레킹이었습니다.

 

 

 

※ 트레킹 일지

- 일시 : 2015년1월 30일 (날씨 조금 흐림 - 추음)

- 코스 : 마천동 남한산성입구-서문-북문-종로-개원사 (약6km 약3시간-절구경포함)

- 인원 : 혼자

- 난이도 : ★☆☆☆☆

 

 

 

 

 

 

마천동에서 시작하는코스 첫번째 만나는 작은 사찰 - 성불사

 

 

 

부지런히 올라가면 약 30분이면 도착하는 연주봉 옹성

 

 

산성으로 진입하는 멋드러진  연주봉 옹성 암문

 

 

남한산성의 또하나의 자랑인 소나무 군락

 

 

남한산성 우익문 서문(성내)

 

 

 

남한산성 우익문 서문(성밖)

 

 

잘 정비된 소나무의 사열- 북문 가는 길 방향

 

 

국청사

 

 

 

 

 

 

 

북장대 터

 

 

 

 

 

 

산성과 소나무의 완벽한 조화

 

남한산성 전승문 북문(성내)

 

 

남한산성 전승문 북문(성밖)         전승문(全勝門) ☞ 전승문(戰勝門) ?

 

 

숭렬전 가는 길 (홍살문)

 

 

숭렬전 사당의 문은 닫혀있네요

 

 

 

종로 로타리에 있는 세계유산 인증 마크

 

 

침괘정

 

 

 

 

 

한남루

 

 

 

※한남루(漢南樓)

남한상성은 험준한 자연지형을 따라 성벽을 구축하여 많은 병력으로도 쉽게 함락되지 않은 역사적 여건을 구비하고 있다.

남한산성 전체는 약 12km에 달하고 면적은 212만 ㎡이다. 남한산성의 본성은 신라 주장성의 옛터를 기초로 하여 인조2년(1624)에서

대대적으로 축성되었다.

남한산성 행궁 역시 축성과 함께 인조3년(1625)에 상궐과 하궐이 건립되었다.

행궁이란 왕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행궁은 20여개로 전 시기에 걸쳐서 조성되고 이용되었는데 능행,전란,휴양등을 목적으로 한다.

이중 남한산성행궁, 북한산성행궁,강화행궁등이 전란을 대비하여 건립한 행궁이다.

인조14년(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하였다.

이후 조선왕조는 숙종37년(1711)좌전과 우실을 건립하는 것을 비롯하여 남한산성의 시설물들을 보수하고 관리,증축하는데

이는 조선의 배도이자 보장처로 역할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숙종,영조,정조,철종,고종등이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으며 특히 정조는 남한산성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남한산성의 사대문에 이름을 짓고 과거시험을 시행하였다.

또한 승군의 전법과 매화포와 같은 무기를 확인하고 야간군사훈련을 실시하였으며 남한산성의 관리상태를 점검하였다.

이후 정조19(1719)년 광주부와 수어청의 이원적 관리를 일원화하여 광주유수부로 승격하고 서울외곽이 방어를 책임지는

군사적 요충지로 자리매김하였다.

한남루(한강 이남의 망루라는 뜻이랍니다.)

한남루는 행궁의 정문으로 영조22년(1798)에 광주유수 홍억이 건립한 누문이다.

궁궐의 제도는 3문이라 하여(황궁은 5문) 정전까지 3개의 문을 거쳐서 들어가는 것이 법도인데 남한산성 행궁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그 전에는 외삼문과 중문만 있던것을 한남루를 대문으로 세워서 삼문삼조의 법도를 완성하였다.

『남한지』『한남루기』에보면 한남루의 뜻이 나타나있는데 한강남쪽 성진의 누대라고 한다.

한남루의 정면기둥과 후면기궁에는 8개의 주련이 걸려 있다(자료인용)

 

 

 

 

연무관

 

※연무관(演武館)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물.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호. 무사들이 무기를 연마하던 곳으로,

건축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정조 때에는 수어영이라 하기도 했다

 

 

약500년된 보호수 느티나무가 연무관을 지켜 줍니다

 

 

※개원사(開元寺)

개원사는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다.

장경사, 망월사와 더불어 국가문화재 사적 5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남한산성 안에 위치하고 있다.

인조 때 임진왜란으로 파손된 남한산성을 새롭게 보수하는 일이 있었다.

이때 인조는 선종 지도자 벽암 각성을 팔도 도총섭으로 임명하고 승군을 모아 남한산성을 보수하게 했다.

남한산성은 전적으로 승군에 의해 보수되게 되었고, 산성의 보수 및 방어의 역할 역시 승군에게 주어졌다.

이를 계기로 1624년에 개원사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후 남한산성 안에는 승군이 주둔할 7개의 사찰을 더 창건하게 되었고, 이 모든 승군의 본영 사찰로 개원사가 활용되었다.

이로써 개원사는 한양을 지키는 호국사찰의 중심이 되었고, 폐사되기 이전까지 조선불교의 중심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1894년에 들어와 승번제도가 폐지되면서 사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는 1907년에 들어와 일제가 남한산성 안에 위치한 사찰들이 화약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사찰들을 철저히 파괴하였다.

장경사에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개원사는 이때 폐사가 된 듯하며, 1909년에 개원사의 루를 장경사로 이건했다고 한다.
개원사에는 승군의 본영사찰이었음을 보여 주듯이 수많은 성보문화재가 전하고 있다.

현재 개원사는 경기도 시도기념물 11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경내에는 비록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으나,

매우 수준 높은 성보문화재들이 보존되어 전하고 있다.

개중에는 17세기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 역시 있어 인조 때 개원사가 건립되기 이전부터 이곳에 혹은 주위에 커다란 사찰이

경영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화현전에 모신 약사여래불, 불유각에 모신 석불, 또한 외부에 따로 불단을 조성하고 모신 석가모니불 등은 오랜 세월동안

승군의 중심사찰 역할을 해온 개원사의 역사를 조용히 얘기해주고 있다. (자료인용)

 

 

 

개원사 일주문 (청량산 개원사 조계문)

 

 

입구의 개원사 송

 

 

개원사 안내문

 

 

개원사 천왕문

 

 

개원사 입구

 

 

개원사 송덕비

 

 

개원사 승장조사전(僧將祖師殿)

 

 

 

개원사 범종각

 

 

 

대각전(본전)

 

 

대각전 내 삼존불

 

 

대각전 앞 석탑

 

 

심검

 

 

노천 석불

 

 

화현전 - 약사여래불 모심

 

 

불유각

 

 

노천석불-대각전 뒤편

 

 

고즈넉한 사찰 분위기

 

 

 

 

 

 

 

오전 빈 시간을 이용해서 일찍 나서서 다녀 온 남한산성의 걷기가 너무나 좋은 발걸음이었다.

남들 출근하는 시간에 5호선 종착역인 마천역에서 시작된 걷기는 잠시 가파른 능선에 오를때 약간의 땀도 났지만

금새 차가운 바람에 식어지고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을 받아서 상쾌하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멋지게 무리를 하고 있는 소나무 군락이 나를 반겨주는 양 발산해주는 피톤치드를 많이 받았다는 점이다.

가족들 깰까 어제밤에 배낭에 막 꾸려나간 아침의 찬 도시락을 먹으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흐른다.

오늘은 걷기도 걷기지만 주면에 흩어져 있는 역사의 현장을 생각보다 무수히 많이 만났다는 것인데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서 역사의 현장을 바로 아는 능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자성도 해 본다.

개원사(開元寺)는 예전에 아는 도반님께서 처음으로 같이 가 보자고 해서 버스타고 잘 오면 될것을, 길을 잘몰라 미리 버스 내려

그 높은 계곡의 위험천만한 얼음 빙판길을 등산장비 없이 용감하게 내려 와서 물어물어 간 약 5년전의 추억이 떠 올라 미소가 진다.

그때 보다 사찰의 규모가 갑자가 늘어나지는 않았을 터인데 많이 넓어 보이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당시 사찰규모가 상당했으리라 짐작이 되나 현재는 일부만 남아서 빈 공간이 많아서 였을텐데 그때는 대충대충 봐서 일까?

아! 그 같이 어렵게 찾아갔던 그 도반님을 어디서 뭘 하실까?

 

오늘은  저번에 완주하지 못한 나머지 남한산성의 한바퀴를 두번째 하는 의미도 있고,좋은 향기있는 민족역사의 현장을

방문하는 기회도 있었고 또한 고즈넉한 역사의 사찰 개원사를 갔다 온 정말 수확있는 남한산성 트레킹인것 같다.

역사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