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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순례

충남 당진 안국사지(安國寺址) 미륵불 & 석탑

 

 

매년 부처님 오신날(음력 초팔일)  전날이 시골의 조모 제사가 있어서 올해는 마침 연휴를 맞이하여

이틀 전(2013년 5월15일)에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이곳 당진은 백제 문화권의 일원으로서 예산.홍성.서산.태안 등과 같이 옛날의 유물과 문화재가 곳곳에 서려있고

그 중에 면천에 있는 천년고찰 영탑사(靈塔寺)와 정미면에 있는 안국사지(安國寺址)를 찾았습니다.

이번에는 천년 안국사지 미륵불과 안국사지석탑을 소개합니다.

 

 

 

 

※ 충남 당진의 안국사지(安國寺)

충청남도 당진군 정미면 수당리 안국산(安國山)에 있었던 절.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이곳에서 출토된 금동불소상(金銅佛小像)과 석불입상(石佛立像) 등의 유물들이 고려시

대의 작품인 것으로 보아 고려 때의 창건 사찰로 보인다.

이 절의 폐사연대 또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해미현조(海美縣條)에 안국산에 사찰이 있는데,

 안국사라 부른다고 한 것으로 보아 1531년까지 절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뒤 폐사되었고, 1929년에는 주지 임용준(任龍準)이 옛터에 다시 중창하였으나 얼마 뒤 다시 폐사되었다.

사지에 현존하는 문화재로는 보물 제100호인 안국사지석불입상(安國寺址石佛立像)과 보물 제101호인 안국사지석탑이 있다.

 석불 3구가 한 줄로 서 있는 석불입상은 본존불이 네모진 돌로 된 보관을 쓰고 있어 안국미륵 또는 갓 쓴 바위라고도

불리는 특이한 모습이다.

이 밖에도 미륵불 입상 뒤에 있는 큰 바위에는 ‘餘美北天口(여미북천구)’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서 여미현(餘美縣 :

지금의 당진군 일부) 근처에서 이 절이 명찰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자료인용)

 

 

 

 

 

  안국사지 입구

 

 

 

안국사지는 사적기가 없어서 정확한 역사를 알 수 없어서 백제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라고도 하고,

고려 때 창건된 사찰이라고도 한다.

안국사지 입구에 들어서면 커다란 암석들을 길 양편에 성처럼 높게 쌓은 것이 인상적일 뿐, 사찰임을 알리는

일주문이나 사찰 편액은 커녕 사찰의 경계를 알게 하는 담장조차 없다.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과 석탑(보물제100호,101호) 전경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제100호)

 

 

 

 

안국사지의 대표적 유적인 삼존석불입상 중 본존불은 약5m 높이로서 머리는 원통형이고, 얼굴은 4각형으로 넓적하다.

머리에는 논산 관촉사의 미륵부처처럼 학사 모자와 같은 네모진 석관을 쓰고, 지그시 감은 눈과 납작한 코,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은 엄숙하다기 보다는 서민적 정감을 풍기게 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너무 가는 몸체와 빈약한 팔은 불상이라기보다는 마치 장승같고, 팔과 손도 몸과 어울리지 않는

위치에 붙어 있어서 조금은 비현실적이다.
삼존석불의 불균형과 엉성함은 본존불 양쪽에 있는 협시보살도 마찬가지인데, 오른쪽의 협시보살은 원형 상태이지만,

왼쪽 협시보살은 그나마 얼굴이 절반정도 파손되어 있다.(자료인용)

 

 

 

 

안국사지 석탑(보물제101호)

 

 

 

삼존석불입상 앞에는 원래는 5층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단부와 4층 옥개석이 있는 4층 석탑이 있다.

석탑은 탑신부(塔身部)에 비하여 기단부가 2매의 장대석으로 지대석을 삼는 등 매우 간략한데, 탑신과 옥개석도 각각 1석으로 되었다.

또, 탑신도 아래층만 남아 있고, 옥개석은 탑신에 비해서 매우 크지만, 그래도 추녀 끝에서 깊게 들어간 옥개받침은 경사

가 심하지 않아서 대체로 체감비율은 알맞다.
석탑은 전체적으로 볼 때 조형미가 없으며, 탑재(塔材) 가공 면에서도 약간 엉성해서 우수한 작품이라 할 수 없으나,

탑신의 조각이나 옥개석의 양식이 고려 초~ 중기 충청지방 불교석탑의 특징과 경향을 알게 해준다고 각각 보물로 지정되었다. (자료인용)

 

 

 

안국사지 매향암각(埋香岩刻)

 

 

안국사지 매향암각은 높이 2.93m, 길이 13.35m, 폭 2.5m의 크기인데, 그 연호를 통해서 전국에서 발견된 매향과

관련된 명문 중 비교적 초기인 여말선초에 세웠으며, 또 조성시기를 달리하는 2건의 매향자료인 점과 안국사지와

주변지역의 역사,매향 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자료인용)

 

 

 

 

 

 

 

 

 

 

2003년 발굴조사 때 '대평(大平)'이란 요(遼) 성종(1021~1030)의 연호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됨으로서

최소한 고려 현종10년(1030) 거란이 3차에 걸쳐 고려를 침입을 받고 혼란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지은 호국 사찰로

추정하게 되었다.(자료인용)

 

 

 

 

원찰(願刹) 역할을 맡아오던 안국사지는 천년고찰 터임을 짐작하게 하는 가람배치 터나 고목들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

 (자료인용)

 

 

 

 

신축 중인 전각들

 

 

 

 

미륵불이 향하는 방향은 은봉산

 

 

 

 

 

입상과 석탑의 거리가 불과 1~2m에 위치하고 있어서 과연 이것이 원래의 석탑과 불상의 위치였는지,

그렇다면 금당은 어디쯤에 있었는지 약간 의문이고 체계적인 복원이 필요.

 

 

 

 

 

길 왼편에는 큼지막한 바위들을 옹기종기 쌓은 곳이 마치 안국사지의 전망대 역할을 하는데,

그 아래에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체가 있다.

 

 

 

 

전망대를 올라가면 바위 동산

 

 

 

 

바위동산에서 바라보면 항아리가 많은 멋진 요사채

 

 

 

 

입구의 돌무덤

 

 

 

 

사찰입구의 안국지

 

 

 

내포의 문화숲길(둘레길)

 

 

 

 

주변에 은봉산,구은봉산,봉화산의 등산로가 열려있습니다

 

 

 

 

 

안국사는 고려 현종때인 1030년 3차에 걸친 거란의 침입 이후 민심 안정을 위해 창건한 천년 고찰로 삼존입상을 던 금당이 소실되는 등 현재는 절터와 석탑 등 일부만 남아있다.
안국사 삼존입상은 발가락까지 제작된 고려시대 석불 입상이 드물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안국사지 삼존석불입상은 세련된 솜씨로 조각한 위엄 있고 권위적 모습이 아니라 마치 어깨너머로 익힌 것처럼

투박한 솜씨이고, 4층 석탑 조차 엉성해서 후삼국시대 50년가량 혼란스런 사회 현상을 그대로 드러낸 모습인데,

이와 비슷한 논산 관촉사의 미륵부처 등을 일컬어 충청도 지방의 향토성이 담긴 미륵부처라고도 한다.

당진군이 안국사의 소실된 금당을 복원하고 보물 제101호인 안국사 석탑과 도지정기념물 제163호인 매향암각 주변을
정비해 1천년전의 모습을 재현할 계획이라 하니 조금 늦더라도 차근차근 고증을 거쳐서 보완했으면 한다.